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다.
모든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자유인과 노예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하고 싶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사람은 노예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인생관은 대개 실제로 살아 보고 경험해 본 결과를 통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습관에 의해서 타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돈이 많다는 것이 인간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만족도가 달라지거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지금 행복을 맞이 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과거의 남이 더 불행한지 지금의 자기가 더 불행한지, 똑같은 상황에서 자기가 더 나은지 남이 더 나은지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해 보는 마음이 없다면 타인의 불행에 대해 기뻐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다.
세상의 온갖 글들 가운데, 나는 오로지 피로 쓴 것만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당신의 피로 써야 한다. 그러면 피가 곧 정신임을 이해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피로써 글을 쓰는 사람은, 남들이 자기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외우기를 원한다.
두 산 사이의 가장 가까운 길은 두 산봉우리를 직선으로 연결한 것이다. 이 길을 가려면 우리는 매우 긴 다리가 필요하다. 피로 쓴 글은 산과 같다. 정신이 풍부하고 높게 성장한 사람만이 이러한 글을 이해할 수 있다.
거대한 산 속에 들어가면 공기는 맑지만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듯이, 위대한 글에는 당신의 정신을 위협하는 위험이 기쁨과 함께 공존한다. 상반된 이 두 가지가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이다.
나는 이미 산정에 서서 발밑의 구름을 내려다본다. 나는 무거운 먹구름을 비웃고 있지만, 비접한 자들에게는 이 구름이 폭풍우 가 되어 몰아칠 것이다.
비겁한 자들이 위를 올려다볼 때, 나는 산정에서 아래를 내려 다본다. 산정에 오른 사람은 모든 비극과 불운을 비웃는다.
노예 같은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고, 폭군 같은 사람은 친구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여자들의 마음속에는 노예도 폭군도 모두 들어 있다. 여자들은 오직 사랑을 알 뿐이다. 여자의 사랑 속에는,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들어 있다. 따라서 여자들은 친구를 얻을 수 없다. 여자들은 언제까지나 고양이거나 새, 그렇지 않으면 암소일 뿐이다.
여자가 당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여자를 두려워 해야 한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모든 것을 바치려 하고, 사랑 이외에는 모두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남자의 행복은 '내가 원한다' 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 는 것이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전부 바칠 때 비로소 세상이 완전 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여자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임신이다. 여자에게 남자는 하나의 수단일 뿐, 여자의 목적은 언제나 아이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남자는 삶에서 두 가지를 즐기려 한다. 하나는 위험이고, 또 하나는 유희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가장 위험한 유희 상대로 소유하려 드는 것이다.
계산에 빠른 사람들조차 자기 아내를 선택할 때는 포장지를 뜯어 보지도 않은 채 물건을 사듯 무책임하게 선택을 한다.
결혼이란 대부분이 두 마리 짐승의 결합에 불과하다.
연애는 순간적인 어리석음이지만 결혼은 영원한 어리석음이다.
동정심은 삶의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모든 종류의 무기력한 자들을 포용함으로써 인간의 삶 전체를 음 울하고 괴이한 모습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동정심을 미덕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모든 생물은 이 세상에 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완전한 개체이다. 즉, 각 생물은 모두 똑같은 단계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원숭이로서 완벽하고, 물고기는 물고기로서, 곤충은 곤충으로서 생존의 완벽한 생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강하고 선량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을 식견이 좁고 노예 본능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 검증된 일만 실행하는 사람은 그 일을 하는 데 자신감도 붙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여러 가지 행동의 가능성이나 방향에 대해 경험과 지식이 결핍되어 있고 식견이 좁은 데다가, 유연성이 없고 자유로운 결단도 어려울 뿐이다. 당연히 선택의 폭도 무척 좁다.
우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약속할 수 있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약속할 수가 없다. 감정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언제까지나 누구를 사랑하겠다든가 미워 하겠다든가, 또는 영원히 충성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는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침묵이 용납되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말을 하더라도 자기가 실제로 체험하고 극복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그 밖의 말이란 쓸데없는 것이거나 공연히 지어낸 것이며, 인격이 도야되지 않아서 나오는 것이다.
체력이나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자기 보존 본능도 약화되고, 그 결과 자신마저 해칠 수 있다.
인류는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쇠퇴해 가는 힘을 잃지 않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해왔으며, 전쟁이 아니면 어떤 형태의 것이든 전쟁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힘 을 과시해 왔던 것이다.
국가가없는 곳에서만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탄생한다. 이 러한 인간이야말로 넘쳐나는 쓸모없는 인간과 구별되는 참된 인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만 참된 인간의 노래가 들릴 것 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사라지는 곳으로 눈을 돌리라. 그곳에 무지개와 초인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보인다.
국가가 소유하는 것은 모두 도둑질로 얻은 것들이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 독배를 마시는 곳이 바로 국가다.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모두 자아를 상실하는 곳이 바로 국가다. 사람들이 매일 서서히 죽어 가고 있으면서 그것을 '생활' 이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국가다.
국가의 소유물이 된 무수한 인간을 보라!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며,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할 때다. 아직 인간의 대지는 씨앗을 뿌 려도 될 만큼 비옥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도 메마르고 헐 벗어 그 어떠한 나무도 자랄 수 없게 될 것이다.
슬픈 일이지만, 머지않아 인간이 인간을 초월하여 동경의 화 살을 쏘지 못하고, 자기의 활시위를 울릴 줄 모르는 때가 올 것 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혼돈을 간직해야 한다. 그래서 그 속에서 춤추는 별을 탄생시켜야 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인간이 아직도 이러한 혼돈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슬픈 일이지만, 머지않아 인간이 어떠한 별도 탄생시 키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또한 자신에 대해 경멸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장 심한 경멸을 받아 마땅한 인간쓰레기의 시기가 올 것이다.
이토록 타락한 인간이 언젠가는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조란 무엇인가? 동경이란 무엇이며, 별이란 도대체 무엇인 가? 라고 물으며 눈을 깜박일 것이다.
그때 인간의 대지는 초라하게 축소될 것이며, 그 위에서 인간 의 땅을 축소시키는 타락한 인간이 뛰어다닐 것이다. 그리고 그 족속은 벼룩처럼 없애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렇게 타락한 인간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 버틸 족속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살기 힘든 땅을 떠난다. 따뜻한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웃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것 역시 단지 따뜻한 체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들고 믿음이 없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조심조심 걸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나 인간에게 걸려 넘어지는 바보 일 뿐이다. 적은 양의 독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지만, 많은 양의 독은 편안한 죽음으로 인도한다.
또한 이렇게 타락한 인간들도 여전히 노동을 한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위안도 몸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한다.
이때가 되면 인간은 더 이상 가난해지지도 부유해지지도 않는다. 그들이 가난해지든 부유해지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 이다. 누가 지배하든, 누가 지배당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모두 목자를 잃은 한 무리의 양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아지려 할 것이고, 누구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이들 가운데 남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으로 실러 가게 될 뿐이다.
이때의 사람들은 모두 영리하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나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끝없이 세상을 비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싸우지만 곧 화해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쾌락을 누리게 되겠지만, 늘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뿐일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처럼 인간의 병리적 열광의 심리 상태와 감정적 몰입 현상을 이용해서 인간의 이성을 지배 하고, 감성과 정서의 고갈을 추구해 왔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결국 멀쩡한 사람을 죄의식으로 옭아매고 파멸시키거나 마비 또는 도취하게 만들어 왔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죄에 대해 지옥을 내세워 위협하고 처벌하려는 하느님, 속죄를 강력히 요구하는 하느님, 은충을 선별적으로 베풀어 주는 하느님을 강조해 왔다. 만일 그러한 것들이 참으로 예수의 가르침이라면 무수한 성직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러 나설 시간과 여유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지상의 어떠한 생물이나 개체든 선천적 본성과 본능을 잃어버리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들을 선택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타락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물은 힘이 강해지면서 성장을 해야만 이 세상에서 종족이 유지되는 반면, 힘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생물이나 개체는 계속 쇠퇴하고 멸망해 갔다.
유대교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과관계를 인위적인 죄와 벌이라는 반자연적 관계로 만들어버렸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종교 권력에 대항한 죄로 죽은 것이다.
예수의 저항운동은 당시 유대교 성직자들과 성직 계급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배 권력에 도전한 죄로 죽은 것이다. 그가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죄없는 자가 죄 있는 자들의 죄를 대신 받아 죽는 희생, 이 얼마나 잔인한 이교주의인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자신들에게 알맞은 신을 만들어내었다. 복음서와 상충되는 개념인 '재림'이나 '최후의 심판'이라는 미래적인 기대와 약속을 '구세주'라는 탈을 씌워 만들어냈다.
예수는 자유주의자였다. 예수가 오늘날의 거대한 기독교 교회 권력과 조직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예수가 인류에게 전해준 것은 오로지 사랑의 실천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오직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마음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경험에 불과하다. 그러나 교회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 복음과 전혀 반대되는 거대한 교회의 탑을 세웠다.
복음서에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했지만, 교회 권력은 자기들을 방해하는 세력이나 개인을 지옥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처단했다.
복음서는 유대교를 반대한 유대인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썼다. 결국 모두 유대인들이다.
자연사와 죽음에 대하여...
기계를 인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이 좋을까, 저절로 고장이 나서 못쓰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을까? 수많은 기계들이 아무런 효용성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기계의 유지란 기계 전체에 대한 일종의 경멸감에서 나오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기계를 억지로 정지시키는 것은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이 힘을 남용하는 것이고, 저절로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은 유지비만 낭비하는 꼴이 된다. 유지비의 낭비란, 다른 곳에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는 돈이 아깝게도 낭비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일 뿐이다.
종교에서 자살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최고차원의 이성적 존재인 신이 저차원의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인간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하나의 커다란 이성이며, 수많은 감각을 지닌 감각체이다. 사람들은 '자아'라는 것을 떠받들지만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은 '육체', 그리고 육체에 깃들여 있는 이성이다.
육체 안에 '본래의 자아'가 살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강하게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본래의 자아'다.
당신의 육체 안에는 가장 탁월한 지혜보다 더 뛰어난 이성이 있다.
* 여행자 5등급 (인생의 여로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이렇게 다섯 등급으로 확실히 구별된다.)
1) 최하급 여행자 :남에게 관찰당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 여행지나 여행의 대상에 머물러 있다. 지극히 수동적임.
2) 자신의 눈으로 실제로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자
3)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실제로 체험해보는 여행자
4)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해내는 사람들
5) 최고 등급 여행자 : 보고 듣고 체험하고 이해한 것들을 즉시 자신의 행동에 활용하는 사람들. 내면으로 체험한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활용하며 살아감. 인생의 진정한 여행자.
천재는 건조한 공기와 맑은 하늘이 배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환경은 신속한 신진대사에 의해 강력한 힘을 계속해서 많이 공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준다. 그것이 천재를 배출해 내는 조건이다.
소나무는 귀를 기울여 무엇인가 열심히 듣고 있는 것 같다. 전나무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초조해하는 빛은 없다.
*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잘 알고 있다.
* 인간이란 오로지 행복만 추구하며 사는 존재는 아니다.
*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대단한 영웅이 되고 싶은가?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싶은가? 찾아야 할 것은 바로 당신의 영혼이다.
* 자신을 도우라. 그러면 누구나 도와줄 것이다.
* 자기만족은 감기도 막아 준다. 한겨울에도 짧은 치마 차림에 멋부리며 다니는 여자는 감기도 안 걸린다.
* 당신은 진실한 사람인가? 아니면 배우에 불과한가? 인생을 자기 의지로 이끌고 가지 못한다면 남의 흉내나 내는 배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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